퇴근 후 지쳐서 집에 들어오면 요리할 엄두가 안 날 때가 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편의점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과자 봉지를 뜯으면서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던 시절이 꽤 길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리함이 쌓이고 쌓여 몸이 조용히 망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중독성: 멈출 수 없는데 배는 부르다
저는 처음에 과자를 많이 먹는 게 단순한 습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배가 분명히 부른 상태에서도 시즈닝이 잔뜩 묻은 스낵을 멈추지 못하는 저를 발견하면서부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탄산음료 없이는 밥을 먹어도 개운하지 않은 느낌, 그게 취향이 아니라 중독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초가공식품(UPF)이란 자연 식재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화학적 공정을 거쳐 맛과 식감을 인위적으로 강화한 시판용 식품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 라면, 햄, 과자류, 탄산음료, 아이스크림, 시리얼처럼 마트에서 흔히 보이는 가공 제품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식품들은 감미료, 방부제, 색소, 향미증진제 같은 식품첨가물을 복합적으로 사용해 뇌의 보상 회로를 지속적으로 자극합니다. 뇌의 보상 회로란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도파민이 분비되어 "더 먹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 신경 경로로, 이 회로가 지속적으로 자극되면 과식과 음식 중독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서울대 최형진 교수(뇌인지과학·해부학)는 초가공식품이 지나치게 쾌락적이고 중독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어 음식 중독과 과식을 직접적으로 유발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읽었을 때 "이게 바로 내 얘기구나" 싶었습니다.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라, 뇌가 요구하는 걸 멈추지 못하는 상태였으니까요.
만성질환: 중성지방 수치가 보내는 경고
건강검진에서 중성지방 수치가 기준치를 훌쩍 넘어섰다는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운동을 안 한 것도 아니고, 밥을 특별히 많이 먹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매일 먹던 편의점 음식과 과자, 탄산음료가 쌓여서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중성지방(Triglyceride)이란 혈액 속에 존재하는 지방의 일종으로, 수치가 높아지면 심혈관 질환과 대사 질환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초가공식품에는 유리당과 포화지방이 과다하게 포함되어 있어 중성지방 수치를 빠르게 끌어올리는 주범으로 꼽힙니다. 반면 식이섬유와 양질의 단백질 함량은 낮아, 결과적으로 열량만 높고 영양 밀도는 낮은 식단을 만들어냅니다.
국제 학술지 랜싯(The Lancet)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초가공식품 비율이 10% 증가할 때마다 하루 총 열량 섭취량이 약 34.7칼로리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The Lancet). 전 세계 43명의 전문가가 참여해 36개국 데이터를 분석한 이 연구에서는 비만, 당뇨병, 심혈관 질환, 우울증을 포함한 12가지 건강 상태와 초가공식품 섭취 간의 유의미한 연관성이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의 상황이 심각합니다. 1998년에서 2018년 사이 한국인의 총 열량 섭취량 중 초가공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2.9%에서 32.6%로 약 2.5배 증가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증가율이 가장 가파른 나라 중 하나입니다. 다음은 초가공식품 과다 섭취와 연관성이 보고된 건강 이상 신호들입니다.
- 원인 불명의 만성 피로 및 무기력감
- 브레인 포그(Brain Fog): 머리가 맑지 않고 집중력이 저하되는 상태
- 피부 트러블 및 성인 여드름
- 혈중 중성지방 및 공복혈당 수치 상승
- 우울감 및 기분 변동 증가
저도 이 목록에서 여러 개를 직접 경험했습니다. 당시에는 왜 그런지 몰랐지만, 식단을 바꾼 후에야 "이게 음식 때문이었구나"라는 걸 체감했습니다.
식단개선: 한 가지씩 덜어내는 것부터
처음부터 완벽한 식단을 갖추려 하면 사흘을 못 버팁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내일부터 자연식만 먹겠다"가 아니라, "오늘 탄산음료 대신 물을 마셔보자"는 작은 결정이 훨씬 오래갑니다.
NOVA 분류체계(NOVA Classification System)는 식품을 가공 정도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는 체계입니다. 여기서 NOVA란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교의 카를로스 몬테이로 박사가 2009년에 처음 고안한 식품 분류 기준으로, 비가공식품, 가공식재료, 가공식품, 초가공식품으로 식품을 구분합니다. 이 분류를 기준으로 삼으면 마트에서 무엇을 고를지 판단하는 데 실용적인 도움이 됩니다.
식단 개선은 구체적일수록 지속됩니다. 저는 아래 순서대로 하나씩 바꿔나갔고, 한 달이 지나자 브레인 포그가 줄어들고 피부가 안정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 탄산음료를 물 또는 무가당 탄산수로 교체
- 냉동 즉석식품 대신 냉장 보관 가능한 삶은 달걀, 고구마 등 최소 가공식품으로 대체
- 간식을 시즈닝 스낵에서 과일, 견과류로 전환
- 외식 시 가공육 메뉴 대신 신선 재료 중심 메뉴 선택
브라질은 이미 학교 급식에서 초가공식품을 제외하고, 2026년까지 급식의 90%를 신선식품 또는 최소 가공식품으로 의무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출처: 랜싯 연구팀 보고서). 정책 차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분명하지만,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식탁에서 먼저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가공식품이 무조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고령 1인 가구처럼 요리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경우, 가공식품이 영양 섭취의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존중합니다. 다만 제 경험상, '선택 가능한 상황'에서도 습관처럼 초가공식품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식탁에서 초가공식품을 하나씩 덜어내는 과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맛이 없고 심심하게 느껴지던 음식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 본래의 맛이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뇌가 강한 자극에 길들여져 있었던 거라, 그 자극에서 멀어지는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오늘 저녁 한 가지만 바꿔보는 것, 그 작은 시작이 석 달 뒤의 혈액검사 수치를 조금 다르게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걸 직접 경험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의학적 조언이 아닙니다. 건강 이상이 의심될 경우 반드시 의료 전문가와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230008.html